시/한시

무제(無題)-미상(未詳)

묵안 2020. 11. 9. 22:27

無題(무제)

-제목 없음- 미상(未詳)

是是非非都不關(시시비비도부관) 옳으니 그르니 모두 부질 없으니

山山水水任自閑(산산수수임자한) 산은 산, 물은 물 그저 한가롭네.

莫問西天安養國(막문서천안양국) 서방 극락이 어디냐 묻지를 말게

白雲斷處有靑山(백운단처유청산) 흰구름 걷힌 그곳이 청산이라네.

이번에 올리는 한시는 임제종(臨濟宗)의 개산조(開山祖)인 임제 의현(臨濟 義玄, 815? ~ 867년 혹은 866년) 대사의 작품이라는 곳도 있었지만 미상(未詳)이라는 곳이 더 많아 지은이를 모른다는 미상(未詳)으로 했고, 제목도 따로 없어 "제목 없음"인 무제(無題)로 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옳으니 그르니를 가지고 부질 없이 다투는 일이 많지만, 산과 물을 보면 서로 옳고 그름을 가지고 다투는 일 없이 언제나 있는 그대로 한가롭기만 하다. 불교에서는 서방 세계에 극락 정토가 있다고 하지만 흰구름으로 묘사한 오욕칠정과 탐진치(貪瞋癡)가 걷힌 그 자리가 바로 극락 세계가 아닌가 하는 가르침을 주는 간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고 하면 내가 옳은 것이 되고, 네가 옳고 내가 그르다고 하면 네가 옳은 것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다툼은 진리의 측면에서 보면 모두 부질 없는 일인지 모른다.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잣대)도 사람에 따라 달리 보기 때문에 그 기준이 흔들리면 더욱 큰 분란만 일으키게 된다. 자연 가운데서 사람만큼 서로간에 갈등을 일으키고 어려움을 자초하며 사는 생명체도 드물 것이다. 사람들의 속성을 보면 자기 합리화와 자기 정당화를 위해 많은 정력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자신보다는 많은 생명들과 함께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쪽으로 힘을 모으는 노력을 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산과 물을 보면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다툼이나 갈등 자체가 없고,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최대한 살려내면서 오롯하게 머물고 흐르고 있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기 때문에 탐욕도 집착도 어리석음에 의한 시비 분별조차 없다. 서방 세계에 있다고 하는 극락 정토라는 것도 결국 사람들의 본성(本性)을 드러나게만 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바로 그토록 가기를 바라는 극락 정토인 청산이라고 일갈하고 있다. 사는 것이 고해(苦海)라고 하지만, 자신에게 드리운 잡념들을 걷어내기만 하면 언제나 푸른 하늘과 빛나는 태양이 항상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며 사는 것이 극락(極樂)이고 천국(天國)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