浪吟(낭음)
-허투루 읊다- 삼가정(三可亭) 박수량(朴遂良)
口耳聾啞久(구이농아구)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된 지 오래지만
猶餘兩眼存(유여양안존) 그래도 두 눈은 멀쩡한 그대로 일세.
紛紛世上事(분분세상사)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의 일들을
能見不能言(능견불능언) 볼 수는 있지만 말은 다할 수 없다네.
이번에 올리는 한시는 조선 중기의 삼가정(三可亭) 박수량(朴遂良) 선생의 작품이다. 조선일보에 21016년 7월 말경에 실린 것을 보고 오늘날의 세태와 다를 것이 없다고 눈여겨 보았는데, 다시 생각이 나서 옮겨보았다. 삼가정 선생은 혼란한 연산군과 중종 시대에 지조를 지켜 고향 강릉에 물러나 살았다고 하는데, 광기의 세상에도 권력과 부를 향해 정신줄을 놓고 달려드는 사람들 많았다. 세상이 미쳐 날뛸 때 그들과 함께 미친 척하고 나서야 한 자리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는 오히려 입도 귀도 닫아버렸다. 귀로 듣고 정직하게 말로 내뱉었다가는 자칫 큰코 다칠 수 있어서 였다. 그렇다고 세상 몰라라 할 수도 없고, 눈을 부릅 뜨고 지켜보며 견뎌야 했던 광기와 폭압의 시대를 견디는 정신을 밝혀서 "내가 배움도 없으면서 진사에 급제했으니 욕됨이 없어 좋고, 땅도 없으면서 날마다 두 끼를 먹으니 굶주림이 없어 좋고, 덕망도 없으면서 산수에 머무니 속됨이 없어 좋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세 가지가 좋다는 '삼가'란 호는 그런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현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3년 반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렇게 나라다운 나라를 외치던 자가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어떤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국민들이 경제 파탄과 실정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법치 파괴와 헌법 유린 등으로 정신적이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고 있는지 그 자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마이웨이만 부르고 있다. 언론이나 방송들은 아예 현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면서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게 하고 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없고 정상적인 곳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집권 세력들은 아무런 문제도 잘못도 없다고 항변을 하면서 궤변까지 늘어놓고 있다. 국가 안보도 내팽개치고 대공 라인은 작동을 하지 않은지 오래여서 간첩을 한 명도 잡은 실적이 없다고 한다. 거기에다 부동산 정책 실패로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리로 오르면서 세금 폭탄까지 날리고 있다. 거기에다 무법천지에 거짓말공화국이 되었다. 이럴 때 낭음(浪吟)이 제격이다.
다음은 네이버에서 검색한 삼가정(三可亭) 박수량(朴遂良) 선생과 관련한 내용이다.
박수량(朴遂良)은 조선 성종 6년(1475년)부터 명종 1년(1546년)까지 산 학자며 효자로,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군거(君擧)이며, 호는 삼가정(三可亭)이다. 부친은 교수(敎授) 박승휴(朴承休)이고, 모친은 영해이씨 감찰(監察) 이중원(李仲元)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518년(중종 13) 7월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충청도사(忠淸都事)와 용궁현감(龍宮縣監)을 거쳐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등을 지냈다. 1519년(중종 14) 겨울에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와 당숙인 박공달(朴公達)과 쌍한정(雙閑亭)에서 시와 술, 담론으로 여생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지극하였으며, 학문이 높았으나 벼슬에 나갈 생각은 않고 오직 산수(山水)를 벗 삼았다. 하루는 과거에 급제한 고향 사람이 방문하였는데, 박수량(朴遂良)의 어머니가 그를 칭찬하며 부러워하였다. 박수량(朴遂良)은 “무릇 사람의 자식 된 자는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제일”이라 하여 마침내 1504년(연산군 10)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모친상을 당해 대과에는 응시하지 못하였다. 이때가 마침 연산군이 삼년상을 27일 만에 탈상하도록 하는 단상제(短喪制)를 매우 엄하게 시행할 때였다. 그러나 박수량(朴遂良)은 “차라리 쇠망치로 맞아서 죽을지언정 선왕(先王) 때부터 지켜온 법은 어길 수 없다.” 하여 여막(廬幕)에 거처하며 삼년상을 치렀다.
1518년(중종 13) 7월 별과피천(別科被薦)으로 충청도사(忠淸都事)와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냈다. 중종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를 올리던 날, 중종이 박수량(朴遂良)에게 “요 순시대의 정치를 지금도 다시 할 수 있느냐?”라고 묻자, “신이 시골에 살았으므로 풀의 본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풀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그 맛이 썼으면 지금도 그 풀은 쓰고, 옛날에 단 풀은 지금도 그 맛이 단 것입니다. 풀의 성질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우리 인간의 본성이 또한 어찌 고금(古今)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요순의 정치를 지금이라 못할 리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중종은 탄복하였다고 한다.
용궁현감으로 있을 때 두 형제가 토지 문제로 오래도록 다투어 왔으나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그들을 불러 술을 권하면서 타이르기를 “토지는 얻기 쉬우나 형제는 얻기 어렵다. 내가 덕이 없어 너희들이 이렇게 싸우니 내가 무슨 면목으로 너희들을 다스리는 주인 노릇을 하겠느냐.” 하고 눈물을 흘리니, 두 형제는 그 자리에서 크게 깨닫고 마침내 그 소송문서를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문집으로『삼가집(三可集)』이 전한다. 묘소는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에 있고, 1508년(중종 3)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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